2009년 9월 30일 수요일

[김영나의 서양미술산책] [10] 뭉크의 '절규'

입력 : 2009.07.08 05:36

 

블록버스터 미술 전시에 관객이 몰리는 것을 보면 미술도 많이 대중화되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전시뿐 아니라 인쇄매체나 인터넷에서 쉽게 미술작품을 접하게 되면서 몇몇 유명 작품들은 대중문화에 편입되어 변형되거나 새로운 의미를 얻기도 한다. 이런 작품 중에 노르웨이 화가 에드바르 뭉크(1863~1944)의 '절규'가 있다.

이 작품의 배경은 노르웨이의 수도 오슬로의 해변가다. 노을이 지는 저녁에 다리 위를 걸어가던 한 인물이 갑자기 두 손으로 귀를 막고 비명을 지른다. 실제로 비명 소리는 들리지 않지만 메아리처럼 배경의 풍경 속으로 퍼져가면서 화면 전체를 울리듯 시각화되었다. 뭉크는 어느 날 두 명의 친구와 함께 걷다가 갑자기 하늘이 핏빛으로 변했고, 자연으로 이어지는 무한한 절규를 느꼈던 경험에서 영감을 받았다고 고백했다.

뭉크의 '절규'.
세기말 인간의 신경쇠약적인 불안과 고독을 표현하는 이 그림의 해골과 같은 얼굴은 강한 충격을 준다. 그는 인상주의 그림들처럼 독서를 하는 여성을 그리기보다는 느끼고 고통받고 숨을 쉬고 사랑을 하는 사람들을 그리겠다고 말했다. 직접적이고 강렬하게 인간의 내면세계를 노출시킨 뭉크의 그림들은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뭉크의 전시회가 열린 곳곳에서 그의 작품들이 철거되는 소동이 일어났다.

한때 과격하게 여겨졌던 이 작품은 20세기 후반에 오면서 친밀한 대중적 '아이콘'이 되었다. 사람들은 절규의 이미지를 자유롭게 해석하기 시작했다. 1994년 노르웨이 국립미술관에서 이 작품이 도난당했을 때 낙태반대 운동을 벌이던 사람들은 자신들이 훔쳤다고 하면서 '절규'는 죽어가는 태아의 소리 없는 비명이라고 주장했다.

'절규'의 이미지는 가면으로도 만들어져 핼러윈 파티에 단골로 등장하기도 하고, 학자금이 없어 비명을 지르는 학생들의 이미지로도 쓰였다. 가장 유머러스한 것은 40세로 중년을 맞이한 사람에게 보내는 생일카드에 사용된 경우다. 이 세상에 유일무이한 작품이라는 원작의 신비는 사라지고, '절규'는 오늘날 일상의 이미지가 되었다.

[김영나의 서양미술산책] [9] 르 코르뷔지에의 성당

입력 : 2009.06.30 22:37 / 수정 : 2009.07.06 10:55

 

대영박물관에 소장된 파르테논 신전의 대리석 조각들이 그리스에서 재차 반환요구를 하면서 다시 주목을 받고 있다. 이 조각상들은 19세기에 영국의 외교관 엘긴이 그리스에서 영국으로 가져간 것인데, 그런 연유로 일명 '엘긴 마블'이라고 불린다. 그리스 미술 전성기에 지어진 파르테논 신전(기원전 447~438년)은 아테네가 페르시아와의 전쟁에서 이긴 후 수호신 아테네 여신에게 바친 신전이다.

파르테논은 '군신(軍臣) 아테네 여신의 방'이라는 뜻이다. 국가의 힘과 이상을 대내외에 알리고자 했던 이 신전은 아크로폴리스(높은 도시라는 의미)에 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지은 하얀 대리석의 장엄한 건축이다. 명확한 구조와 완벽한 균형 및 비례를 보이는 이 신전은 아테네인이 믿었던 조화로운 우주적 질서를 반영한다.

‘노트르담 뒤 오’성당.
파르테논 신전은 이후 많은 예술가들에게 영감을 주었다. 대표적인 인물은 스위스 태생의 건축가 르 코르뷔지에(1887~1965)이다. 그는 젊었을 때 파르테논 신전을 보고 '파르테논은 드라마'라고 노트에 썼다. 르 코르뷔지에가 1955년에 프랑스 서부의 작은 도시 롱샹에 지은 '노트르담 뒤 오' 성당은 파르테논에 대한 그의 반응이다. 초록색 잔디의 높은 언덕 위에 서있는 이 성당은 파란 하늘을 등지고 하얀 실루엣을 드러내며 파르테논을 연상시킨다.

롱샹의 이 성당은 지금까지 있었던 어떤 종교적 건물과도 다르다. 약 300명 정도의 신도들이 앉을 수 있는 이 작은 성당은 건축이라기보다는 조각과 같다. 벽과 지붕은 모두 기울어진 선이나 곡선으로 되어 있다. 외부의 모습은 마치 성곽이나 보트를 연상시키고, 천장이 곡선으로 내려앉은 내부는 동굴에서 예배를 보는 듯한 은밀한 느낌을 준다.

천장과 벽 사이에는 약 10㎝ 정도 간격이 있어 그 사이로 들어오는 빛이 신비스럽게 실내를 밝힌다. 무엇보다 각각 크기가 다른 창문의 현대적 스테인드글라스의 아름다움은 극적인 감명을 불러일으킨다. 시각적이고, 감정적이면서 명상적인 롱샹의 성당은 현대 종교건축의 또 다른 드라마다.

[김영나의 서양미술산책] [8] 베르메르의 위작

입력 : 2009.06.23 23:17 / 수정 : 2009.06.26 10:12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라는 영화가 있다. 스칼렛 요한슨과 콜린 퍼스가 주연한 이 영화는 17세기 네덜란드 델프트에서 활약한 화가 베르메르가 그린 그림을 주제로 한 픽션이다. 19세기 중엽에야 진지한 연구가 시작된 요하네스 베르메르의 생애는 영화와는 달리 아직 확실하지 않은 부분이 많다. 그동안 베르메르가 거의 알려지지 않았던 이유는 그가 화가이면서 화상(畵商)이어서 작품을 많이 제작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베르메르는 창문이 있고 지도나 그림이 걸려 있는 방에서 여성의 일과나 남녀가 음악을 연주하는 장면들을 즐겨 그렸다. 차갑고 섬세한 빛의 흐름은 물체의 구조와 색채의 변화를 미묘하게 포착한다. 친밀한 공간 속의 인물들은 세속의 일상에서 벗어나 꿈과 같이 조용하고 신비스러운 분위기를 준다. 대부분 소품이지만 완벽한 질서와 시각적 화음은 그를 17세기 네덜란드의 대표적인 화가로 인정받게 하였다.

베르메르의 ‘물 주전자를 쥐 고 있는 여인’
현재 알려진 베르메르의 작품은 36점이다. 미술사학자들은 그의 작품이 더 나타날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가지고 있었다. 이런 희망을 이용한 사람이 바로 한 반 미게렌이었다. 사실 묘사에 탁월했던 이 화가는 20세기 초 추상미술이 대세가 되자 재능을 인정받지 못했다. 그는 베르메르의 물감과 터치를 연구했다. 그런 다음 17세기 무명화가의 그림을 사서 물감을 벗겨내고 그 위에 베르메르처럼 그리고 사인을 했다. 저명한 미술사학자들이 모두 속아 넘어가 이 위작들은 대가들의 작품과 나란히 미술관에 걸리게 되었다. 그러나 결국 그는 고백을 하고 말았는데, 위조작품 한 점이 히틀러의 오른팔이었던 괴링의 손에 들어가는 바람에 국보급 작품을 적에게 팔았다는 반역 혐의를 받았기 때문이었다.

위작은 고대부터 존재했다. 미술 작품의 가격이 천문학적으로 뛰어오른 오늘날에는 전문적인 위조자가 더 많아졌다고 한다. 유명한 미술사학자이자 뛰어난 감식가였던 막스 프리드먼은 90세가 넘어 눈이 어두워졌어도 작품 앞에 서면 직감으로 진품인지 아닌지 알았다고 한다. 그와 같은 학자들의 전설은 끝나고 만 것일까?

[김영나의 서양미술산책] [7] 한국전 참전 기념물

입력 : 2009.06.16 23:02 / 수정 : 2009.06.18 11:15

6·25를 기념하는 기념물은 우리나라는 물론이지만 유엔군으로 참전했던 나라에서도 상당수 발견할 수 있다. 그중 가장 규모가 큰 것이 미국 워싱턴 DC의 내셔널 몰에 있는 '한국전참전용사기념물'이다. 1995년에 완성된 이 기념물은 순찰 나온 미군 19명이 서로 주의를 환기시키며 한발 한발 나가고 있는 모습이다.

이들에게 모두 비옷을 입힌 이유는 많은 군인이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던 북한에서 가장 견디기 어려웠던 것은 혹한과 비바람이었다고 회고했기 때문이다. 조각상들 앞에는 원형의 '기억의 연못'이 있고 거기에는 "자유는 거저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라는 구절이 적혀 있다. 또 옆에는 길이 50m의 검은 화강암 벽에 컴퓨터 그래픽으로 처리한 2400명의 육·해·공군, 군목, 간호사들의 얼굴이 새겨져 있다.

미국 워싱턴 DC의 ‘한국전참전용사기념물'.
이 기념물 건립은 1982년 내셔널 몰에 세워진 '월남전참전용사기념물'에 자극을 받아 추진되었다. 월남전기념물은 70m에 달하는 두개의 검은 화강석이 125도 각도로 V자 형태로 마주치는 단순한 추상 형태였다. 검은 화강석에는 사망한 군인 5만8007명의 이름이 새겨져 있었다. 승리보다는 죽은 병사를 기억하게 하는 이 기념비의 참신함에 대해 미술계에서는 찬사를 보냈지만, 검은색은 슬픔과 수치를 상징하므로 참전 군인을 모욕하는 것이라는 비난도 거셌다.

월남전기념물에 대한 논쟁은 한국전기념물에도 영향을 줬다. 한국전기념물 건립위원회는 참전 군인들의 의견을 잘 반영하고 생생한 전투장면을 사실적으로 재현하기를 원했다. 아주 뛰어난 사실성을 보여주는 기술적인 훌륭함은 실제 전투에 참여한 병사들의 긴장과 피곤을 매우 인상적으로 전달한다. 이 기념물이 전쟁을 더 이상 승리와 패배로 이해하고 있지 않다는 점은 중요하다. 기념물이 영웅적인 전투나 행위에 초점을 맞추어야 하는 개념에서도 벗어났다. 그보다는 자유와 민주주의의 수호라는 명분 아래 헌신한 평범한 군인들이 중심이 되었다는 점에서 기념물 역사에 중요한 획을 그은 조형물이다.

[김영나의 서양미술산책] [6] 미술가의 교육

입력 : 2009.06.09 23:07 / 수정 : 2009.06.18 11:21

 

나의 이메일 이름은 첸니니다. 이메일을 계정할 때 마침 중세 이탈리아의 화가 첸니노 첸니니(Cennino Cennini·1370?~1440?)에 대한 책을 읽고 있어서였다. 작품은 거의 남아 있지 않지만 첸니니가 오늘날까지 기억되는 이유는〈일 리브로 델라르테(미술의 책)〉를 썼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이 익힌 기술을 다른 미술가에게 전수하기 위해 이 책을 썼다고 밝혔다. 화가가 되기 위해서는 적어도 13년의 훈련이 필요하다고 한 그는 모든 미술의 기본은 드로잉이며, 도제 첫 일 년 동안 매일 종이나 패널에 펜·초크·목탄·붓으로 연습하라고 충고했다.

르네상스에 들어오면 화가의 훈련은 기술단련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이론과 지식, 과학에 바탕을 두어야 한다는 인식이 확산되었다. 그러나 드로잉에 대한 강조는 여전했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1452~1519)는 관찰력과 상상력을 키우려면 항상 스케치 북을 가지고 다니라고 권장했다. 1563년 아카데미아 델 디세뇨가 세워져 처음으로 미술을 체계적으로 가르친 이후 유럽 미술 아카데미의 기본과정은 인체와 석고 드로잉으로 이루어졌다. 이토록 드로잉을 강조한 이유는 서양회화가 주로 역사·종교·신화를 주제로 하는, 기본적으로 인물을 그리는 미술이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보는 사람이 그림에 등장하는 인물의 얼굴표현, 동작, 운동감에서 감정을 읽고 주제를 이해할 수 있도록 해야 했다.

15세기 초 첸니니의 제단화.
19세기 중반부터 이에 대한 반발이 시작되었다. 미술가들은 그림을 그리는 데는 하나의 방법만 있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면서 다른 미술가들과 구별되는 독창적인 양식을 추구하기 시작했다. 이들이 바로 모더니즘 미술가들이다. 그러나 모더니즘 미술이 중요시한 창의력과 자기표현 중심의 실기 교육이 지나치게 엘리트적인 미술가를 양산했다고 보는 시각도 있다. 최근 폴 게티 재단에서 미술가 지망생들에게 성(性)·인종 등 다양한 문화를 이해할 수 있는 인문 교양 프로그램을 지원하기 시작한 것도 이런 이유에서이다.

우리나라 모 대학의 미대 입학시험에 실기가 없어진다고 한다. 우리 시대의 훌륭한 미술가를 키우기 위한 바람직한 교육은 무엇인지 생각해 보게 된다.

[김영나의 서양미술산책] [5] 홀바인의 초상화

입력 : 2009.06.03 03:27 / 수정 : 2009.06.05 09:19

 

초상화가 실제 인물과 똑같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아부일 가능성이 높다. 왜냐하면 적어도 인상주의 이전까지는 화가들이 인물을 이상화해 그리는 것이 상식이었기 때문이다. 16세기에 활약했던 독일의 한스 홀바인(1497~1543)은 자신이 파악한 인물의 단점을 훌륭하게 보완해 그려 의뢰인을 만족시키는 데 탁월한 능력이 있었던 초상화가였다.

바젤에서 인문주의자 에라스무스의 초상을 그린 후 그의 소개로 영국으로 간 홀바인은 헨리 8세의 대법관이던 토머스 모어의 초상화를 그렸다. 이런 인연으로 영국에 머물게 된 그는 곧 헨리 8세(재위 1509~ 1547)의 궁정화가가 되었다.

알려진 바와 같이 헨리 8세는 6번이나 결혼을 했다. 첫번째 왕비 아라곤의 캐서린과 이혼하고 두번째 왕비인 앤 볼린을 처형했던 헨리 8세는 세번째 왕비 제인 시무어가 죽자 또다시 새로운 신붓감을 찾고 있었다. 교황 세력에 맞서고자 한 그는 외국 신부를 맞이하는 편이 유리할 것이라고 판단했다. 그는 홀바인을 브뤼셀에 보내 남편을 여읜 지 얼마 되지 않은 덴마크 공주 크리스티나를 그려 오게 하였다.

덴마크의 크리스티나(왼쪽)와 클리브즈의 앤.
이 초상화에서 크리스티나는 수줍은 듯이 약간 돌아선 채 보는 사람을 응시하고 있다. 보석이나 장식이 전혀 없는 검은색 상복은 오히려 지적이면서 단아한 얼굴을 돋보이게 하고 매혹적인 눈은 이 여성에 대해 더 알고 싶게 한다. 정략결혼이기는 했지만 아름다운 여성을 좋아했던 헨리 8세는 이 초상화에 끌려 크리스티나와 결혼하기를 원했다. 그러나 헨리 8세의 경력을 알고 있던 이 똑똑한 미망인은 그와 결혼할 마음이 없었다.

헨리 8세는 다시 홀바인을 네덜란드에 보내 또 다른 신붓감인 클리브즈 공작의 딸 앤을 그려오라고 했다. 앤은 외모가 평범했다. 앤을 돋보이게 하기 위해 홀바인은 화려한 의상과 아름다운 보석들로 치장한 모습으로 그렸다. 헨리 8세는 그림을 보고 마음에 들어 결혼하기로 했다. 그러나 앤이 영국에 도착한 날 실제 모습을 보고 크게 실망한 그는 곧 이혼했다. 뛰어난 화가가 그린 초상화가 얼마나 인물을 미화할 수 있는지를 보여준 사례다.

[김영나의 서양미술산책] [4] 법정에 선 미술품

입력 : 2009.05.26 23:16 / 수정 : 2009.06.01 09:13

미술가는 자신의 작품에 대해 어디까지 권리를 주장할 수 있을까? 뉴욕 맨해튼의 연방플라자 앞에 세워졌다가 철거된 리처드 세라(1939~)의 조각 '기울어진 호(弧)'는 이 문제를 생각하게 한다. 세라는 1979년 미국 정부 총무처로부터 야외조각을 위촉받아 2년 후 약 36m 길이에 3.6m 높이의 거대한 조각을 완성했다. 활 모양으로 휘어져 서 있는 이 작품은 친(親)환경 재료인 코르텐 스틸로 만들었지만 외관상으로는 녹이 슨 것같이 보였다.

작품이 설치된 후 연방건물 직원들 사이에서 이 조각이 시야를 가리고 보기 흉하며, 먼 길을 돌아가게 하기 때문에 작품을 옮겨야 한다는 요구가 나오기 시작했다. 또 공공장소에 설치되는 미술은 작품 중심보다는 관람자 우선이 되어야 한다는 의견이 나왔다. 세라는 자신의 조각은 설치 장소를 고려해 제작한 것이므로 장소를 옮기는 것은 작품을 파괴하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항변했다. 재판까지 간 이 사건에서 법원은 작품의 통제권이 전적으로 소유자, 즉 총무처에 있다는 판결을 내렸고, 1989년 이 작품은 철거됐다.

베로네제의 '레비의 집에서 열린 향연'.

세라는 적어도 자신의 권리를 주장할 기회는 가질 수 있었다. 그러나 반(反)종교개혁이 한창이던 16세기 중반 이탈리아에서는 종교화의 적절성이 종교재판에서 일방적인 판결을 받는 일이 많았다. 베네치아 화가 파올로 베로네제(1528~1588)는 1573년 재판에 회부됐으나 현명하게 대처한 경우다. 남아 있는 재판 기록을 보면, 재판관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최후의 만찬'을 그린 것처럼 보이는 그의 그림에 왜 어릿광대, 코피를 흘리는 사람, 그리고 루터의 종교개혁 후 이단으로 여겨지는 독일인이 등장하는지 물었다.

베로네제는 자신도 작품을 자기 마음대로 구성하는 시인이나 궁정익살꾼(이들은 화가보다 사회적 위상이 높았다)처럼 자격을 갖췄고, 필요하다고 생각해서 그려 넣었다고 답변했다. 결국 그는 3개월 안에 자신의 비용으로 그림 내용을 바꾸라는 판결을 받았다. 베로네제는 이에 불복하고 그림을 고치지 않았다. 대신 그는 종교화로 보이지 않게 그림 제목을 '레비의 집에서 열린 향연'으로 바꿔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