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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9월 30일 수요일

[김영나의 서양미술산책] [10] 뭉크의 '절규'

입력 : 2009.07.08 05:36

 

블록버스터 미술 전시에 관객이 몰리는 것을 보면 미술도 많이 대중화되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전시뿐 아니라 인쇄매체나 인터넷에서 쉽게 미술작품을 접하게 되면서 몇몇 유명 작품들은 대중문화에 편입되어 변형되거나 새로운 의미를 얻기도 한다. 이런 작품 중에 노르웨이 화가 에드바르 뭉크(1863~1944)의 '절규'가 있다.

이 작품의 배경은 노르웨이의 수도 오슬로의 해변가다. 노을이 지는 저녁에 다리 위를 걸어가던 한 인물이 갑자기 두 손으로 귀를 막고 비명을 지른다. 실제로 비명 소리는 들리지 않지만 메아리처럼 배경의 풍경 속으로 퍼져가면서 화면 전체를 울리듯 시각화되었다. 뭉크는 어느 날 두 명의 친구와 함께 걷다가 갑자기 하늘이 핏빛으로 변했고, 자연으로 이어지는 무한한 절규를 느꼈던 경험에서 영감을 받았다고 고백했다.

뭉크의 '절규'.
세기말 인간의 신경쇠약적인 불안과 고독을 표현하는 이 그림의 해골과 같은 얼굴은 강한 충격을 준다. 그는 인상주의 그림들처럼 독서를 하는 여성을 그리기보다는 느끼고 고통받고 숨을 쉬고 사랑을 하는 사람들을 그리겠다고 말했다. 직접적이고 강렬하게 인간의 내면세계를 노출시킨 뭉크의 그림들은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뭉크의 전시회가 열린 곳곳에서 그의 작품들이 철거되는 소동이 일어났다.

한때 과격하게 여겨졌던 이 작품은 20세기 후반에 오면서 친밀한 대중적 '아이콘'이 되었다. 사람들은 절규의 이미지를 자유롭게 해석하기 시작했다. 1994년 노르웨이 국립미술관에서 이 작품이 도난당했을 때 낙태반대 운동을 벌이던 사람들은 자신들이 훔쳤다고 하면서 '절규'는 죽어가는 태아의 소리 없는 비명이라고 주장했다.

'절규'의 이미지는 가면으로도 만들어져 핼러윈 파티에 단골로 등장하기도 하고, 학자금이 없어 비명을 지르는 학생들의 이미지로도 쓰였다. 가장 유머러스한 것은 40세로 중년을 맞이한 사람에게 보내는 생일카드에 사용된 경우다. 이 세상에 유일무이한 작품이라는 원작의 신비는 사라지고, '절규'는 오늘날 일상의 이미지가 되었다.

[김영나의 서양미술산책] [9] 르 코르뷔지에의 성당

입력 : 2009.06.30 22:37 / 수정 : 2009.07.06 10:55

 

대영박물관에 소장된 파르테논 신전의 대리석 조각들이 그리스에서 재차 반환요구를 하면서 다시 주목을 받고 있다. 이 조각상들은 19세기에 영국의 외교관 엘긴이 그리스에서 영국으로 가져간 것인데, 그런 연유로 일명 '엘긴 마블'이라고 불린다. 그리스 미술 전성기에 지어진 파르테논 신전(기원전 447~438년)은 아테네가 페르시아와의 전쟁에서 이긴 후 수호신 아테네 여신에게 바친 신전이다.

파르테논은 '군신(軍臣) 아테네 여신의 방'이라는 뜻이다. 국가의 힘과 이상을 대내외에 알리고자 했던 이 신전은 아크로폴리스(높은 도시라는 의미)에 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지은 하얀 대리석의 장엄한 건축이다. 명확한 구조와 완벽한 균형 및 비례를 보이는 이 신전은 아테네인이 믿었던 조화로운 우주적 질서를 반영한다.

‘노트르담 뒤 오’성당.
파르테논 신전은 이후 많은 예술가들에게 영감을 주었다. 대표적인 인물은 스위스 태생의 건축가 르 코르뷔지에(1887~1965)이다. 그는 젊었을 때 파르테논 신전을 보고 '파르테논은 드라마'라고 노트에 썼다. 르 코르뷔지에가 1955년에 프랑스 서부의 작은 도시 롱샹에 지은 '노트르담 뒤 오' 성당은 파르테논에 대한 그의 반응이다. 초록색 잔디의 높은 언덕 위에 서있는 이 성당은 파란 하늘을 등지고 하얀 실루엣을 드러내며 파르테논을 연상시킨다.

롱샹의 이 성당은 지금까지 있었던 어떤 종교적 건물과도 다르다. 약 300명 정도의 신도들이 앉을 수 있는 이 작은 성당은 건축이라기보다는 조각과 같다. 벽과 지붕은 모두 기울어진 선이나 곡선으로 되어 있다. 외부의 모습은 마치 성곽이나 보트를 연상시키고, 천장이 곡선으로 내려앉은 내부는 동굴에서 예배를 보는 듯한 은밀한 느낌을 준다.

천장과 벽 사이에는 약 10㎝ 정도 간격이 있어 그 사이로 들어오는 빛이 신비스럽게 실내를 밝힌다. 무엇보다 각각 크기가 다른 창문의 현대적 스테인드글라스의 아름다움은 극적인 감명을 불러일으킨다. 시각적이고, 감정적이면서 명상적인 롱샹의 성당은 현대 종교건축의 또 다른 드라마다.

[김영나의 서양미술산책] [8] 베르메르의 위작

입력 : 2009.06.23 23:17 / 수정 : 2009.06.26 10:12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라는 영화가 있다. 스칼렛 요한슨과 콜린 퍼스가 주연한 이 영화는 17세기 네덜란드 델프트에서 활약한 화가 베르메르가 그린 그림을 주제로 한 픽션이다. 19세기 중엽에야 진지한 연구가 시작된 요하네스 베르메르의 생애는 영화와는 달리 아직 확실하지 않은 부분이 많다. 그동안 베르메르가 거의 알려지지 않았던 이유는 그가 화가이면서 화상(畵商)이어서 작품을 많이 제작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베르메르는 창문이 있고 지도나 그림이 걸려 있는 방에서 여성의 일과나 남녀가 음악을 연주하는 장면들을 즐겨 그렸다. 차갑고 섬세한 빛의 흐름은 물체의 구조와 색채의 변화를 미묘하게 포착한다. 친밀한 공간 속의 인물들은 세속의 일상에서 벗어나 꿈과 같이 조용하고 신비스러운 분위기를 준다. 대부분 소품이지만 완벽한 질서와 시각적 화음은 그를 17세기 네덜란드의 대표적인 화가로 인정받게 하였다.

베르메르의 ‘물 주전자를 쥐 고 있는 여인’
현재 알려진 베르메르의 작품은 36점이다. 미술사학자들은 그의 작품이 더 나타날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가지고 있었다. 이런 희망을 이용한 사람이 바로 한 반 미게렌이었다. 사실 묘사에 탁월했던 이 화가는 20세기 초 추상미술이 대세가 되자 재능을 인정받지 못했다. 그는 베르메르의 물감과 터치를 연구했다. 그런 다음 17세기 무명화가의 그림을 사서 물감을 벗겨내고 그 위에 베르메르처럼 그리고 사인을 했다. 저명한 미술사학자들이 모두 속아 넘어가 이 위작들은 대가들의 작품과 나란히 미술관에 걸리게 되었다. 그러나 결국 그는 고백을 하고 말았는데, 위조작품 한 점이 히틀러의 오른팔이었던 괴링의 손에 들어가는 바람에 국보급 작품을 적에게 팔았다는 반역 혐의를 받았기 때문이었다.

위작은 고대부터 존재했다. 미술 작품의 가격이 천문학적으로 뛰어오른 오늘날에는 전문적인 위조자가 더 많아졌다고 한다. 유명한 미술사학자이자 뛰어난 감식가였던 막스 프리드먼은 90세가 넘어 눈이 어두워졌어도 작품 앞에 서면 직감으로 진품인지 아닌지 알았다고 한다. 그와 같은 학자들의 전설은 끝나고 만 것일까?

[김영나의 서양미술산책] [7] 한국전 참전 기념물

입력 : 2009.06.16 23:02 / 수정 : 2009.06.18 11:15

6·25를 기념하는 기념물은 우리나라는 물론이지만 유엔군으로 참전했던 나라에서도 상당수 발견할 수 있다. 그중 가장 규모가 큰 것이 미국 워싱턴 DC의 내셔널 몰에 있는 '한국전참전용사기념물'이다. 1995년에 완성된 이 기념물은 순찰 나온 미군 19명이 서로 주의를 환기시키며 한발 한발 나가고 있는 모습이다.

이들에게 모두 비옷을 입힌 이유는 많은 군인이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던 북한에서 가장 견디기 어려웠던 것은 혹한과 비바람이었다고 회고했기 때문이다. 조각상들 앞에는 원형의 '기억의 연못'이 있고 거기에는 "자유는 거저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라는 구절이 적혀 있다. 또 옆에는 길이 50m의 검은 화강암 벽에 컴퓨터 그래픽으로 처리한 2400명의 육·해·공군, 군목, 간호사들의 얼굴이 새겨져 있다.

미국 워싱턴 DC의 ‘한국전참전용사기념물'.
이 기념물 건립은 1982년 내셔널 몰에 세워진 '월남전참전용사기념물'에 자극을 받아 추진되었다. 월남전기념물은 70m에 달하는 두개의 검은 화강석이 125도 각도로 V자 형태로 마주치는 단순한 추상 형태였다. 검은 화강석에는 사망한 군인 5만8007명의 이름이 새겨져 있었다. 승리보다는 죽은 병사를 기억하게 하는 이 기념비의 참신함에 대해 미술계에서는 찬사를 보냈지만, 검은색은 슬픔과 수치를 상징하므로 참전 군인을 모욕하는 것이라는 비난도 거셌다.

월남전기념물에 대한 논쟁은 한국전기념물에도 영향을 줬다. 한국전기념물 건립위원회는 참전 군인들의 의견을 잘 반영하고 생생한 전투장면을 사실적으로 재현하기를 원했다. 아주 뛰어난 사실성을 보여주는 기술적인 훌륭함은 실제 전투에 참여한 병사들의 긴장과 피곤을 매우 인상적으로 전달한다. 이 기념물이 전쟁을 더 이상 승리와 패배로 이해하고 있지 않다는 점은 중요하다. 기념물이 영웅적인 전투나 행위에 초점을 맞추어야 하는 개념에서도 벗어났다. 그보다는 자유와 민주주의의 수호라는 명분 아래 헌신한 평범한 군인들이 중심이 되었다는 점에서 기념물 역사에 중요한 획을 그은 조형물이다.

[김영나의 서양미술산책] [6] 미술가의 교육

입력 : 2009.06.09 23:07 / 수정 : 2009.06.18 11:21

 

나의 이메일 이름은 첸니니다. 이메일을 계정할 때 마침 중세 이탈리아의 화가 첸니노 첸니니(Cennino Cennini·1370?~1440?)에 대한 책을 읽고 있어서였다. 작품은 거의 남아 있지 않지만 첸니니가 오늘날까지 기억되는 이유는〈일 리브로 델라르테(미술의 책)〉를 썼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이 익힌 기술을 다른 미술가에게 전수하기 위해 이 책을 썼다고 밝혔다. 화가가 되기 위해서는 적어도 13년의 훈련이 필요하다고 한 그는 모든 미술의 기본은 드로잉이며, 도제 첫 일 년 동안 매일 종이나 패널에 펜·초크·목탄·붓으로 연습하라고 충고했다.

르네상스에 들어오면 화가의 훈련은 기술단련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이론과 지식, 과학에 바탕을 두어야 한다는 인식이 확산되었다. 그러나 드로잉에 대한 강조는 여전했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1452~1519)는 관찰력과 상상력을 키우려면 항상 스케치 북을 가지고 다니라고 권장했다. 1563년 아카데미아 델 디세뇨가 세워져 처음으로 미술을 체계적으로 가르친 이후 유럽 미술 아카데미의 기본과정은 인체와 석고 드로잉으로 이루어졌다. 이토록 드로잉을 강조한 이유는 서양회화가 주로 역사·종교·신화를 주제로 하는, 기본적으로 인물을 그리는 미술이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보는 사람이 그림에 등장하는 인물의 얼굴표현, 동작, 운동감에서 감정을 읽고 주제를 이해할 수 있도록 해야 했다.

15세기 초 첸니니의 제단화.
19세기 중반부터 이에 대한 반발이 시작되었다. 미술가들은 그림을 그리는 데는 하나의 방법만 있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면서 다른 미술가들과 구별되는 독창적인 양식을 추구하기 시작했다. 이들이 바로 모더니즘 미술가들이다. 그러나 모더니즘 미술이 중요시한 창의력과 자기표현 중심의 실기 교육이 지나치게 엘리트적인 미술가를 양산했다고 보는 시각도 있다. 최근 폴 게티 재단에서 미술가 지망생들에게 성(性)·인종 등 다양한 문화를 이해할 수 있는 인문 교양 프로그램을 지원하기 시작한 것도 이런 이유에서이다.

우리나라 모 대학의 미대 입학시험에 실기가 없어진다고 한다. 우리 시대의 훌륭한 미술가를 키우기 위한 바람직한 교육은 무엇인지 생각해 보게 된다.

[김영나의 서양미술산책] [5] 홀바인의 초상화

입력 : 2009.06.03 03:27 / 수정 : 2009.06.05 09:19

 

초상화가 실제 인물과 똑같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아부일 가능성이 높다. 왜냐하면 적어도 인상주의 이전까지는 화가들이 인물을 이상화해 그리는 것이 상식이었기 때문이다. 16세기에 활약했던 독일의 한스 홀바인(1497~1543)은 자신이 파악한 인물의 단점을 훌륭하게 보완해 그려 의뢰인을 만족시키는 데 탁월한 능력이 있었던 초상화가였다.

바젤에서 인문주의자 에라스무스의 초상을 그린 후 그의 소개로 영국으로 간 홀바인은 헨리 8세의 대법관이던 토머스 모어의 초상화를 그렸다. 이런 인연으로 영국에 머물게 된 그는 곧 헨리 8세(재위 1509~ 1547)의 궁정화가가 되었다.

알려진 바와 같이 헨리 8세는 6번이나 결혼을 했다. 첫번째 왕비 아라곤의 캐서린과 이혼하고 두번째 왕비인 앤 볼린을 처형했던 헨리 8세는 세번째 왕비 제인 시무어가 죽자 또다시 새로운 신붓감을 찾고 있었다. 교황 세력에 맞서고자 한 그는 외국 신부를 맞이하는 편이 유리할 것이라고 판단했다. 그는 홀바인을 브뤼셀에 보내 남편을 여읜 지 얼마 되지 않은 덴마크 공주 크리스티나를 그려 오게 하였다.

덴마크의 크리스티나(왼쪽)와 클리브즈의 앤.
이 초상화에서 크리스티나는 수줍은 듯이 약간 돌아선 채 보는 사람을 응시하고 있다. 보석이나 장식이 전혀 없는 검은색 상복은 오히려 지적이면서 단아한 얼굴을 돋보이게 하고 매혹적인 눈은 이 여성에 대해 더 알고 싶게 한다. 정략결혼이기는 했지만 아름다운 여성을 좋아했던 헨리 8세는 이 초상화에 끌려 크리스티나와 결혼하기를 원했다. 그러나 헨리 8세의 경력을 알고 있던 이 똑똑한 미망인은 그와 결혼할 마음이 없었다.

헨리 8세는 다시 홀바인을 네덜란드에 보내 또 다른 신붓감인 클리브즈 공작의 딸 앤을 그려오라고 했다. 앤은 외모가 평범했다. 앤을 돋보이게 하기 위해 홀바인은 화려한 의상과 아름다운 보석들로 치장한 모습으로 그렸다. 헨리 8세는 그림을 보고 마음에 들어 결혼하기로 했다. 그러나 앤이 영국에 도착한 날 실제 모습을 보고 크게 실망한 그는 곧 이혼했다. 뛰어난 화가가 그린 초상화가 얼마나 인물을 미화할 수 있는지를 보여준 사례다.

[김영나의 서양미술산책] [4] 법정에 선 미술품

입력 : 2009.05.26 23:16 / 수정 : 2009.06.01 09:13

미술가는 자신의 작품에 대해 어디까지 권리를 주장할 수 있을까? 뉴욕 맨해튼의 연방플라자 앞에 세워졌다가 철거된 리처드 세라(1939~)의 조각 '기울어진 호(弧)'는 이 문제를 생각하게 한다. 세라는 1979년 미국 정부 총무처로부터 야외조각을 위촉받아 2년 후 약 36m 길이에 3.6m 높이의 거대한 조각을 완성했다. 활 모양으로 휘어져 서 있는 이 작품은 친(親)환경 재료인 코르텐 스틸로 만들었지만 외관상으로는 녹이 슨 것같이 보였다.

작품이 설치된 후 연방건물 직원들 사이에서 이 조각이 시야를 가리고 보기 흉하며, 먼 길을 돌아가게 하기 때문에 작품을 옮겨야 한다는 요구가 나오기 시작했다. 또 공공장소에 설치되는 미술은 작품 중심보다는 관람자 우선이 되어야 한다는 의견이 나왔다. 세라는 자신의 조각은 설치 장소를 고려해 제작한 것이므로 장소를 옮기는 것은 작품을 파괴하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항변했다. 재판까지 간 이 사건에서 법원은 작품의 통제권이 전적으로 소유자, 즉 총무처에 있다는 판결을 내렸고, 1989년 이 작품은 철거됐다.

베로네제의 '레비의 집에서 열린 향연'.

세라는 적어도 자신의 권리를 주장할 기회는 가질 수 있었다. 그러나 반(反)종교개혁이 한창이던 16세기 중반 이탈리아에서는 종교화의 적절성이 종교재판에서 일방적인 판결을 받는 일이 많았다. 베네치아 화가 파올로 베로네제(1528~1588)는 1573년 재판에 회부됐으나 현명하게 대처한 경우다. 남아 있는 재판 기록을 보면, 재판관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최후의 만찬'을 그린 것처럼 보이는 그의 그림에 왜 어릿광대, 코피를 흘리는 사람, 그리고 루터의 종교개혁 후 이단으로 여겨지는 독일인이 등장하는지 물었다.

베로네제는 자신도 작품을 자기 마음대로 구성하는 시인이나 궁정익살꾼(이들은 화가보다 사회적 위상이 높았다)처럼 자격을 갖췄고, 필요하다고 생각해서 그려 넣었다고 답변했다. 결국 그는 3개월 안에 자신의 비용으로 그림 내용을 바꾸라는 판결을 받았다. 베로네제는 이에 불복하고 그림을 고치지 않았다. 대신 그는 종교화로 보이지 않게 그림 제목을 '레비의 집에서 열린 향연'으로 바꿔 버렸다.

[김영나의 서양미술산책] [3] 라파엘의 매력

입력 : 2009.05.19 23:09 / 수정 : 2009.05.22 16:47

'그란두카의 성모', 1505 년경.
미국 유학 시절 르네상스 미술을 가르치던 교수가 라파엘(1483~1520)의 작품은 나이가 들어야 좋아진다는 이야기를 한 적이 있는데 요즈음 그 의미를 곰곰이 생각해 보게 된다. 레오나르도 다빈치, 미켈란젤로와 더불어 16세기 이탈리아 르네상스 미술의 전성기를 이뤘던 라파엘은 나이는 가장 어렸지만 당시에는 그들과 동등하게 인기를 누렸다.

그런데 강렬하고 신비로운 이미지를 창조한 레오나르도 다빈치와 신과 같은 인체를 조각한 미켈란젤로는 현대에 와서도 대중적 지명도를 누리고 있는 반면, 라파엘은 전문가들 사이에서만 주로 거론되는 것처럼 보인다. 작품을 새롭게 창조하기보다는 다른 대가들의 작품에서 자신이 필요한 요소를 수용하고 종합했던 그의 탁월한 능력이 현대인에게는 높이 평가되지 않기 때문인 것 같다.

1504년, 미술의 중심지였던 피렌체에 온 젊은 라파엘은 성모자(聖母子)상을 많이 그렸다. 성모자상에서 라파엘이 기본적으로 보여주고 싶었던 내용은 종교적인 이야기보다는 인간 문화의 근본인 다정한 모성애의 표현이었다. 이것은 바로 르네상스 정신인 인본주의의 반영이기도 했다. 단순하고 평안하면서도 지적이었던 그의 작품은 1508년에 로마로 가면서 장대한 양식으로 변한다.

라파엘이 교황 율리우스 2세의 주문으로 바티칸에 있는 교황의 서재에 '아테네 학당'을 그리는 작업을 맡았을 때 그의 나이는 불과 26세였다. 그의 최대 걸작으로 평가되는 이 그림은 중앙의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를 중심으로 고대 그리스의 위대한 철학자·과학자·예술가들이 서로 담소를 나누거나 토론을 하고 있는 모습을 그린 것으로, 그리스 문명에 대한 르네상스인의 '오마주'와 같은 의미를 갖는다. 그려진 인물 하나하나가 모두 위엄 있고 설득력 있는 동작으로 각자의 믿음과 학설을 전달하고 있다. 그림 속의 고전적 건축과 인물들은 르네상스의 이상인 완벽한 균형과 조화의 미를 보여준다. 강렬하고 개성적인 작품보다는 지성적이고 균형과 조화를 이룬 미술 앞에서 마음이 편안해지는 것을 보면 이제야 라파엘의 미술이 이해가 되는 듯하다.

[김영나의 서양미술산책] [2]반 고흐와 고갱

입력 : 2009.05.12 22:39 / 수정 : 2009.05.22 16:49

 

생애가 작품만큼 관심을 갖게 하는 예술가들이 있다. 며칠 전 신문에 화가 빈센트 반 고흐(1853~1890)의 귀를 자른 것은 반 고흐 자신이 아니라 동료화가 폴 고갱(1848~ 1903)이었다는 주장이 실렸다. 남부 프랑스의 아를에서 1888년 10월부터 두달을 함께 지내던 반 고흐와 고갱이 격한 언쟁을 벌였고, 반 고흐가 면도칼로 고갱을 위협하자 고갱이 박차고 떠나버렸으며, 감정을 주체하지 못한 반 고흐가 자신의 귓불을 면도칼로 잘랐다는 이야기는 유명하다. 반 고흐를 이렇게 격분시킨 이유는 무엇일까?

네덜란드에 있던 반 고흐가 화상(畵商)을 하는 동생 테오를 찾아 파리로 온 것은 1886년이었다. 같은 해 그는 이곳에서 5세 연상인 고갱을 만났다. 증권 브로커로 일하다가 35세에 화가가 된 고갱은 인상주의를 벗어나려는 젊은 화가들의 리더 격이었다. 얼마 후 반 고흐는 아를로 떠나면서 고갱을 초대했다. 그러나 두 사람의 공동생활은 점점 불편해지기 시작했다. 기질 차이도 있었지만 미술에 대한 생각이 달랐기 때문이다.

고갱은 숙련된 소묘 화가인 앵그르와 드가를 좋아했고, 반 고흐는 고갱이 싫어하는 농민 화가 밀레를 좋아했다. 고갱은 구상을 미리 하고 기억과 상상을 바탕으로 그림을 그리라고 충고했지만, 반 고흐는 눈앞에 펼쳐지는 자연의 물리적 세계와의 감정적 교류에서 영감을 받는 화가였다. 이런 차이는 언쟁으로 이어졌고, 결국 귓불을 자르는 반 고흐의 첫 번째 발작을 촉발했던 것이다.


고갱과 같이 지낼 때 반 고흐는 자신의 의자와 고갱의 의자를 한쌍의 그림으로 그렸다. 반 고흐 자신의 의자에는 그가 늘 애용하던 서민적인 파이프가 놓여 있고, 고갱의 의자에는 지성과 상상력을 상징하는 책과 촛불이 있다. 자신의 의자는 거친 직선을 교차시켜 투박하게 묘사한 반면, 고갱의 의자는 장식적인 곡선과 풍부한 색채로 표현했다. 의자 주인의 존재가 보이지는 않지만 느껴지는 이 그림들은 단순한 정물화를 넘어 신비감마저 느끼게 한다.

빈센트 반 고흐가 그린 '고갱의 의자'(왼쪽) 와‘빈센트의 의자’.

[김영나의 서양미술산책] [1] 아크나톤의 부활

입력 : 2009.05.05 23:20

 
국립중앙박물관에서는 지금 고대 이집트 미술품을 모은 '파라오와 미라'전이 열리고 있다. 이 전시에서 목은 없어지고 몸체만 남은 아주 작은 조각을 보았다. 이 조각은 기원전 14세기 중엽에 재위한 신왕국 18왕조의 파라오 아크나톤의 '샵티'(지하세계에서 파라오 대신 노동을 하는 입상)였다. 이 조각의 앞에는 아크나톤을 의미하는 '카르투슈'가 새겨져 있다. '카르투슈'란 왕이나 왕조를 의미하는 상형문자를 보호하기 위해 둘러싼 끈 모양의 테두리를 말한다.

아크나톤의 원래 이름은 아멘호테프 4세였다. 그는 태어날 때부터 불룩한 배와 가슴, 부푼 눈두덩, 두꺼운 입술과 비죽 튀어나온 턱을 가진 이상 골격의 소유자였다. 여러 설이 있지만 순수한 왕실의 혈통을 유지하기 위해 근친결혼을 하던 이집트 왕가에서 나타난 일종의 유전병으로 추정된다.

그는 그때까지 평온하게 살아오던 이집트에서 과격한 종교 개혁을 단행했다. 가장 강력한 태양신 '아몬 레' 대신 유일한 신 '아텐'을 섬기고, 사람과 동물이 뒤섞인 모양으로 표현되던 신의 모습을 태양 원반으로 표시했으며, 아텐을 숭배하는 많은 신전을 세웠다. 자신의 이름을 아텐에게 복종한다는 뜻의 아크나톤으로 바꾼 그는 수도도 테베에서 아마르나라는 새로운 도시로 옮겼다. 새로운 변화는 아마르나 시기의 미술에도 보인다. 엄격하고 부동적인 모습의 인물들은 유연한 곡선과 자연스러운 움직임으로 표현되었고 파라오 가족의 단란한 일상생활 같은 모습도 미술에 나타나기 시작했다. 대단한 파격이었다.

변화는 얼마 지속되지 못했다. 아크나톤이 죽자 그동안 권력을 잃어버렸던 사제들은 다시 수도를 테베로 옮겼고, 모든 기록과 미술에서 아크나톤의 이름을 지워버리거나 파괴해버려 그의 이름이 역사에서 사라진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근대의 고고학자들은 아마르나를 발굴하면서 유물들을 찾아냈다.

그중의 하나가 현재 베를린의 이집트 박물관에 있는 유명한 네페르티티 두상이다. 아크나톤의 왕비였던 이 네페르티티 두상은 이집트 특유의 형식미와 아마르나 양식의 섬세한 곡선이 아름답게 혼합되어 있는 최고 걸작품이다. 국립 중앙박물관 전시에서 본 아크나톤의 '샵티' 역시 역사의 파괴에서 용하게 남아 있는 조각상이다.

조선일보